존 스튜어트 밀은 1806년 5월 20일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제임스 밀은 벤담의 절친한 동지이자 공리주의 이론가였고, 아들을 '이성으로 완성된 개혁의 지도자'로 키우려는 야심 찬 교육 실험을 벌였습니다. 밀은 세 살에 그리스어를, 여덟 살에 라틴어를 배웠고, 열 살 무렵에는 플라톤과 헤로도토스를 원어로 읽었으며, 십 대에 논리학·경제학·역사를 두루 익혔습니다. 학교에도 교회에도 다니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그야말로 '만들어진'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이 혹독한 교육은 대가를 남겼습니다. 1826년, 스무 살의 밀은 깊은 정신적 위기(mental crisis)에 빠집니다. 스스로에게 '네가 바라던 모든 개혁이 다 이루어진다면 정말 행복하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마음속 목소리가 '아니오'라고 답했고, 삶의 모든 의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분석적 이성만 벼려 온 그의 내면에는 감정을 길러 줄 무엇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워즈워스의 시(詩)를 읽으며 서서히 회복했고, 이 경험을 통해 '느끼는 능력'과 개성·내면의 도야가 이성만큼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훗날 그의 사상이 아버지·벤담의 딱딱한 공리주의를 넘어서게 된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1830년, 밀은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를 만납니다. 이미 결혼한 여성이었던 그녀와 밀은 20여 년간 지적 동반자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그녀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인 1851년에 결혼했습니다. 밀은 자신의 여러 저작, 특히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이 그녀와의 공동 작업의 산물이라고 거듭 밝혔습니다. 남녀평등에 대한 그의 확신도 이 관계에서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1858년 해리엇은 프랑스 아비뇽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밀은 큰 상실 속에서 그녀에게 바치는 헌사와 함께 이듬해 『자유론』을 출간합니다.
밀은 사상가이면서 직업인이자 실무가였습니다. 열일곱이던 1823년부터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에 들어가 인도 통치 실무를 담당했고, 최고 심사관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1857년 인도 대봉기 후 회사가 해체되는 1858년까지 35년을 근무한 뒤 은퇴했습니다. 이 식민 통치 경력은 그의 사상에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합니다(오늘관 참조). 은퇴 후 그는 저술에 전념해 『자유론』(1859)·『대의정부론』·『공리주의』(1861)를 잇달아 발표하며 사상의 절정에 이릅니다.
1865년, 밀은 웨스트민스터 선거구의 하원의원(MP)으로 당선됩니다. 그는 노동자 계급의 참정권 확대를 지지했고, 1867년 제2차 선거법 개정안에서 조문의 '남자(man)'를 '사람(person)'으로 바꾸자는 여성 참정권 수정안을 발의했습니다. 비록 부결됐지만, 이는 영국 의회 역사상 여성의 투표권을 공식 요구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1868년 낙선 후 다시 저술과 사회운동에 힘쓰던 그는 1873년 5월 8일, 아내가 잠든 아비뇽에서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나 해리엇 곁에 묻혔습니다. 그의 『자서전』은 그해 사후에 출간되었습니다.
사건 ①: 1826년, 스무 살의 정신적 위기 — 이성에 감정을 더하다
세 살부터 오직 분석적 이성만 벼려 온 밀은 스무 살에 삶의 의욕이 통째로 무너지는 위기를 겪습니다. 워즈워스의 시를 읽으며 회복한 그는, 개혁의 계산만으로는 사람이 행복할 수 없으며 '느끼는 마음'과 개성의 도야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각성이 그를 아버지·벤담의 딱딱한 공리주의를 넘어 질적 쾌락과 개성을 옹호하는 성숙한 자유주의자로 만듭니다.
사건 ②: 해리엇 테일러와의 20년 — 함께 벼린 자유와 평등
1830년에 만난 해리엇 테일러는 밀에게 단순한 아내가 아니라 사상의 공동 저자에 가까웠습니다. 밀은 『자유론』과 『여성의 종속』이 그녀와의 오랜 대화에서 나왔다고 거듭 밝혔고, 남녀가 완전히 평등해야 한다는 그의 확신도 이 관계에서 벼려졌습니다. 여성의 지성이 사회에서 억눌려 있다는 그의 주장은 곧 자신이 곁에서 목격한 진실이기도 했습니다.
사건 ③: 1867년, 여성 참정권 수정안 — 철학을 정치로
하원의원이 된 밀은 제2차 선거법 개정안에서 '남자'를 '사람'으로 바꾸자고 발의합니다. 부결됐지만, 영국 의회 역사상 여성의 투표권을 공식적으로 요구한 최초의 순간이었습니다. 서재의 원리를 의사당의 표결로 옮긴 이 시도는 그의 사상이 말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