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1712년 6월 28일 스위스 제네바 공화국에서 시계공 이자크 루소(Isaac Rousseau)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쉬잔 베르나르(Suzanne Bernard)는 그를 낳고 아흐레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의 탄생은 나의 첫 불행이었다"고 그는 『고백록』에 적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밤새 소설을 읽으며 감수성을 키웠으나, 그가 열 살 무렵 아버지가 한 시민과의 다툼 끝에 제네바를 떠나면서 그는 사실상 고아처럼 친척 손에 맡겨집니다.
판화 조각가의 도제로 들어갔으나 주인의 학대에 시달리던 그는, 1728년(16세) 산책에서 돌아오다 제네바 성문이 닫힌 것을 보고는 그길로 도시를 등지고 방랑을 시작합니다. 이 방랑길에서 그를 거둔 사람이 마담 드 바랑입니다. 열세 살 연상의 이 후원자 곁에서 그는 12년 남짓을 지내며 음악·라틴어·철학을 독학했고(이 무렵 가톨릭으로 개종), 훗날 사보이의 레 샤르메트(Les Charmettes) 시골집에서의 나날을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로 회고했습니다.
1742년 파리로 나온 그는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고(채택되지는 못함), 디드로와 사귀며 『백과전서』의 음악 항목을 집필합니다. 1745년에는 여관집 하녀 테레즈 르바쇠르(Thérèse Levasseur)와 평생의 반려를 맺습니다. 다만 이 시기 그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아이를 모두 고아원(파리 기아 보호소)에 보냈다고 『고백록』에서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훗날 위대한 교육서 『에밀』을 쓴 사람의 이 행적은, 그의 삶에서 가장 아프고 모순적인 대목으로 남습니다.
1749년, 감옥에 갇힌 디드로를 면회하러 뱅센으로 걸어가던 길에 그는 신문에서 디종 아카데미의 현상공모 제목 —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도덕을 순화시켰는가" — 을 보고 벼락 같은 깨달음(뱅센의 계시)을 얻습니다. 이듬해 그 물음에 "아니다"라고 답한 『학문예술론』(1750)이 당선되며 그는 하루아침에 유럽의 유명 인사가 됩니다. 1755년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61년 소설 『신엘로이즈』, 그리고 1762년 『에밀』과 『사회계약론』이 잇따라 나오며 그의 사상은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1762년은 영광이자 재앙이었습니다. 『에밀』 속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 고백'이 가톨릭과 칼뱅파 양쪽의 노여움을 사, 파리 고등법원은 책을 불태우고 체포 영장을 발부했으며 제네바마저 두 책을 단죄합니다. 그는 스위스 모티에·생피에르 섬, 영국(흄의 초청)으로 떠도는 8년의 망명에 들어갑니다. 1767년 가명으로 프랑스에 돌아와 이듬해 테레즈와 정식으로 혼인했고, 자신을 변호하려 쓴 『고백록』을 낭독하며 만년을 보냈습니다. 1778년 7월 2일, 파리 근교 에르므농빌에서 뇌출혈로 향년 66세에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그리던 자유의 나라가 온 뒤인 1794년, 프랑스 혁명은 그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옮겨 혁명의 정신적 아버지로 기렸습니다.
사건 ①: 1728년, 닫힌 성문 — 방랑자가 되다
열여섯의 도제 소년이 성 밖 산책에서 돌아오다 닫힌 제네바 성문을 마주합니다. 학대하던 주인에게 돌아가느니 도시를 버리기로 한 이 우연한 선택이 그를 평생의 방랑자이자 독학자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고 스스로 읽어 사유한 이 '바깥의 시선'이야말로 그가 문명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사건 ②: 1749년, 뱅센의 계시 — 진보를 의심하다
감옥의 디드로를 만나러 가던 뜨거운 여름 길, 그는 신문에서 "학문과 예술의 진보가 도덕을 순화시켰는가"라는 공모 제목을 읽고 현기증이 일 만큼 강렬한 착상에 사로잡힙니다. 남들이 진보를 찬양할 때 그는 진보의 대가를 물었습니다. 이 한 번의 물음에서 그의 전 사상 — 문명 비판, 자연적 선함, 불평등의 기원 — 이 싹틉니다.
사건 ③: 1762년, 두 권의 금서 — 영광과 추방
같은 해에 나온 『에밀』과 『사회계약론』은 그를 사상의 정점에 올려놓는 동시에 유럽 전역에서 쫓기는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파리 고등법원은 『에밀』을 광장에서 불태우고 체포 영장을 냈으며, 고향 제네바마저 등을 돌렸습니다. 이 추방이 『고백록』이라는 근대 자서전을 낳았고, 30여 년 뒤 그를 팡테옹의 영웅으로 되살아나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