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모실 분

하얼빈의 총성으로 동양평화를 외친 대한의군 참모중장 · 옥중에서 붓을 든 사상가

안중근 초상

安重根 · 1879 ~ 1910

오늘 저자와의 대화에 안중근을 모셨습니다. 반갑게 맞아 주세요.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아버지를 도와 의병을 이끌었고, 천주교 신자(세례명 토마스)로서 학교를 세워 젊은이를 가르쳤으며, 나라의 주권이 무너지자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을 일으킨 분입니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그는 자신을 '개인 자격의 살인자'가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규정하며 만국공법에 따른 재판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사형을 앞둔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미완의 『동양평화론』을 남겼지요. 일곱 개의 방을 따라 그가 살았던 격동의 시대, 신앙과 의(義), 그리고 '동양의 세 나라가 함께 평화를 이루자'던 그의 미완의 꿈을 차근차근 둘러보며 그를 알아가 보세요.

여기서부터 일곱 개의 방이 이어집니다. 천천히 걸어 내려가면, 마지막 방에서 그분이 당신에게 묻습니다.

살던 시대

나라의 문이 열리고, 이내 그 문이 닫혀 가던 한 세대

대한제국 말기 · 1879–1910 (개항·청일·러일전쟁과 국권 피탈)

안중근의 생애(1879–1910)는 조선이 개항(1876) 이후 밀려드는 열강의 각축 속에서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끝내 주권을 잃어 가던 시기와 정확히 겹칩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무렵부터 갑신정변(1884)·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1894)·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1895)이 잇따랐고, 그는 열여섯 나이에 아버지 안태훈이 일으킨 의병 대열에서 동학당 토벌에 직접 나섰습니다.

결정적 전환은 러일전쟁(1904–1905)이었습니다. 일본은 개전 선언문에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내걸었으나, 승리 직후 을사늑약(1905)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이어 정미7조약(1907)으로 광무황제를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습니다. 안중근이 훗날 『동양평화론』에서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짓을 하는가'라고 통탄한 '일본의 배신'이 바로 이 시기의 사건들입니다.

1907년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고, 안중근은 연해주(러시아령)로 망명해 국외 의병 운동에 뛰어듭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 속에서 한·중·일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그의 '동양평화' 구상은, 바로 이 제국주의 경쟁이 극에 달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사상이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1909)초대 한국통감 — 안중근이 '국권 침탈의 원흉'으로 지목해 하얼빈에서 저격한 인물
  • 안태훈 (安泰勳, 부친)동학당 토벌 때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 — 천주교 입교의 계기를 만든 학식 높은 진사
  • 홍 신부 (빌렘, Wilhelm)안중근에게 세례(토마스)를 준 프랑스인 선교사 — 순국 직전 옥중까지 찾아와 성사를 베풂
  • 이범윤 (李範允)연해주 의병 지도자 — 안중근이 거병을 함께 도모한 동지
  • 엄인섭·김기룡연해주에서 맺은 의형제 — 담략과 의협심이 뛰어난 동지들

살아오신 길

청계동에서 하얼빈으로, 그리고 여순 감옥으로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배와 가슴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어릴 적 별명이 응칠(應七)이었지요. 넉넉한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안태훈이 개화파 박영효 사건에 연루될 위기를 겪은 뒤, 온 가족이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주해 은거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사냥과 말타기를 즐기며 '학문으로 이름을 남기지 않겠다'던 그는, 열여섯 살이던 1894년 김아려와 혼인하고 그해 아버지의 의병을 도와 동학당 토벌에 나섰습니다.

가족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안중근도 프랑스인 홍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세례명 토마스(도마)가 됩니다. 그는 전도에 나서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오직 영혼이 있기 때문'이라는 삼혼설(三魂說)을 설파했고, 한편으로는 대학 설립을 건의했다가 거절당하자 '천주교의 진리는 믿되 외국인의 마음은 믿지 않겠다'며 자주(自主)의 뜻을 세웠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그는 상해로 건너가 방책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곽 신부(르각)는 가족 이주 대신 교육·사회 확장·민심 단합·실력 양성 네 가지에 힘쓰라고 권했고('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 조언은 그의 실력양성 노선의 뿌리가 됩니다. 귀국하니 아버지는 이미 별세한 뒤였고, 그는 대한이 독립하는 날까지 술을 끊겠다고 맹세합니다. 이듬해 삼흥학교·돈의학교를 세우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1907년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을 보고 그는 연해주로 망명해 의병에 투신,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됩니다. 1908년 6월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벌였으나, 만국공법을 들어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풀어 준 일로 부대의 신망을 잃고 패퇴했습니다. 굶주림 속에 홀로 산을 헤매던 이 '풍찬노숙'의 시련이 그를 더욱 단련시킵니다.

1909년 초, 동지 12명과 왼손 약지를 끊어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쓰고 삼창한 단지동맹을 맺습니다. 그해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그는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하며 거사를 결심합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뒤 러시아어로 '대한 만세'를 세 번 외치고 체포되었고, 여순 감옥에서 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항소를 포기하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 집필에 매달렸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향년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한평생

  1. 1879

    0

    출생 — 황해도 해주

    별명 응칠(應七). 이후 가족과 함께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해 성장.

  2. 1894

    16

    혼인 · 동학당 토벌 참전

    김아려와 혼인. 아버지 안태훈의 의병 대열에서 선봉으로 활약.

  3. 1897경

    18

    천주교 입교 — 세례명 토마스

    홍 신부(빌렘)에게 세례. 전도하며 삼혼설을 설파함.

  4. 1905

    26

    을사늑약 · 상해행 · 부친 별세

    곽 신부의 4대 방책을 받아들이고, 대한 독립의 날까지 금주를 맹세.

  5. 1906

    27

    삼흥학교·돈의학교 설립

    진남포에서 사재를 털어 교육·인재 양성에 진력.

  6. 1907

    28

    연해주 망명 · 의병 투신

    정미7조약·군대 해산 이후 국외로 건너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됨.

  7. 1908. 6

    29

    두만강 도강 국내 진공작전

    만국공법을 들어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일로 논란을 겪음.

  8. 1909 초

    30

    단지동맹(동의단지회)

    동지 12인과 왼손 약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혈서를 씀.

  9. 1909. 10. 26

    30

    하얼빈 의거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대한 만세'를 삼창하고 체포됨.

  10. 1910. 3. 26

    31

    순국 — 여순 감옥

    사형 선고에 항소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 미완으로 순국.

사건 ①: 1905년, 곽 신부의 '4대 방책' — 총 대신 실력을

을사늑약 직후 상해로 건너가 방책을 찾던 그에게 곽 신부는 가족 이주를 만류하며 교육·사회·민심·실력 네 가지에 힘쓰라 권했습니다. '2000만의 마음이 반석 같으면 1000만 문의 대포로도 깨뜨릴 수 없다'는 이 가르침은, 무장 투쟁과 실력 양성을 함께 품는 그의 노선을 결정지었습니다.

사건 ②: 1909년, 단지동맹에서 하얼빈으로 — 결의가 행동이 되다

왼손 약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쓴 단지동맹은 말이 아닌 몸으로 새긴 맹세였습니다. 몇 달 뒤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자금을 마련해 곧장 하얼빈으로 향했고, 10월 26일 그 결의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사건 ③: 1910년, 옥중의 미완의 붓 — 총을 내려놓고 사상을 남기다

사형을 앞두고 그는 고등법원장에게 집필 시간을 청해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담판의 자리를 총이 아니라 글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나 형 집행이 앞당겨져 서문과 전감(前鑑)만 남긴 채 미완으로 끝났고, 이 미완성 자체가 그의 비극과 사상의 크기를 함께 증언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초상 사진 (여순 감옥, 1910년 촬영)

체포 후 여순 감옥에서 촬영된 안중근. 왼손 약지가 단지동맹으로 잘려 있는 모습이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 PD

핵심 생각

동양평화 · 의(義) · 자강과 독립 · 천주 신앙

안중근의 사상은 하나의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같은 인종, 이웃한 세 나라가 서로 물어뜯으면 결국 누가 이득을 보는가?" 그는 러일전쟁을 '황·백 인종의 경쟁'으로 읽었고, 일본이 승리 후 한국을 억압한 것을 대의(大義)를 저버린 배신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대안은 동양평화(東洋平和) — 한·청·일 세 나라가 서로의 독립을 존중하며 연대해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맞서는 구상입니다. '합하면 흥하고 흩어지면 망한다(合成散敗)'는 것이 그 제1원리였지요. 이 평화론의 바탕에는 의(義) 를 목숨보다 앞세우는 유교적 지사(志士)의 윤리('견리사의 견위수명')와, 자강·실력양성의 계몽 노선, 그리고 영혼불멸을 믿는 천주교 신앙이 하나로 엮여 있습니다. 그는 국가를 '몇몇 고관의 것이 아니라 2000만 민족의 것'으로 본 근대적 국가관 위에서, 자신의 거사를 사사로운 살인이 아니라 만국공법이 인정하는 의병 전쟁으로 규정했습니다.

어려운 한자말이 나와도 겁내지 마세요. 뜻을 먼저 적어 두었습니다. 뜻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동양평화 (東洋平和)

東洋平和 · Dongyang pyeonghwa

한·청·일 세 나라가 서로의 자주독립을 존중하며 대등하게 연대해, 서양 열강의 침탈(서세동점)에 함께 맞서는 평화 구상. 어느 한 나라의 지배가 아니라 세 나라의 공존이 핵심입니다.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얼빈에서 열고, 담판하는 자리를 뤼순으로 정한다 — 『동양평화론』 서문

합성산패 (合成散敗)

合成散敗 · hapseong sanpae

'합치면 이루고 흩어지면 무너진다'는 이치. 동양평화론 전체를 여는 제1원리로, 세 나라가 반목하면 모두 어부지리(방휼지세, 蚌鷸之勢)로 서양에 먹힌다는 경고입니다.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변함없는 분명한 이치이다 — 『동양평화론』 서문

애종당 · 한청연대 (愛種黨·韓淸連帶)

愛種黨 · aejongdang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무리'라는 뜻. 안중근은 인종적 연대를 동양평화의 정서적 토대로 보았으나, 동시에 그것이 침략의 명분이 되어선 안 된다고 경계했습니다. 같은 인종 이웃을 해치는 자는 '독부(獨夫)의 환난'을 면치 못한다고 못박습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 (見利思義 見危授命)

見利思義 見危授命 · gyeollisaui gyeonwisumyeong

『논어』에서 온 말로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친다'는 뜻.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대표 유묵(遺墨)이자, 의(義)를 목숨 위에 두는 그의 지사적 윤리를 압축합니다.

見利思義 見危授命 — 옥중 유묵 (보물)

자강 · 실력양성 (自强·實力養成)

自强 · jagang

교육과 계몽으로 백성의 힘을 길러 스스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노선. 곽 신부의 4대 방책(교육·사회·민심·실력)에서 구체화되었고, 삼흥·돈의학교 설립과 국채보상운동 참여로 실천되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 곽 신부의 조언, 『안응칠 역사』

국가관 — 2000만 민족의 것

大韓國人 · daehanguk-in

국가는 소수 고관의 소유가 아니라 온 국민(2000만 민족)의 것이며, 국민이 의무를 다할 때 비로소 민권과 자유를 얻는다는 근대적·민본적 국가관. 그는 스스로를 '대한국인(大韓國人)'으로 서명했습니다.

국가란 몇몇 고관들의 것이 아니라 당당한 2000만 민족의 것입니다 — 『안응칠 역사』

삼혼설 · 영혼불멸 (三魂說)

生魂·覺魂·靈魂 · samhon-seol

초목의 생혼, 짐승의 각혼, 사람의 영혼이라는 세 층위의 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시비를 분별하는 영혼을 지녀 가장 귀하다는 천주교 교리.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결단을 떠받쳤습니다.

혼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셋째는 영혼이니 그것은 사람의 혼입니다 — 『안응칠 역사』

참모중장 · 만국공법 (參謀中將·萬國公法)

萬國公法 · man-guk gongbeop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를 개인의 살인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수행한 전쟁 행위로 규정하고, 자신을 전쟁 포로로 대우해 국제법(만국공법)으로 재판하라 요구했습니다. 개인적 원한이 아닌 공적 대의의 행동임을 끝까지 주장한 것입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로 하얼빈에서 공격한 뒤 포로가 되었으니, 만국공법으로 판결하라 — 『안응칠 역사』 공판 장면

남기신 글

옥중에서 태어난 자서전과 미완의 평화론, 그리고 붓끝의 유언

안중근이 남긴 글은 대부분 여순 감옥의 마지막 다섯 달 안에 쓰였습니다. 총을 든 의병장이자 동시에 붓을 든 사상가였던 그는, 자신의 삶을 담담히 기록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아시아 세 나라의 공존을 설계한 『동양평화론』을 남겼습니다. 후자는 형 집행이 앞당겨져 끝내 미완으로 그쳤지요. 여기에 더해,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매일 몇 시간씩 써 내려간 200여 폭의 유묵(遺墨) 은 그의 사상을 한 줄로 응축한 또 하나의 저작입니다. 그중 여럿은 오늘날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응칠 역사 (安應七歷史)

1910 (여순 옥중 자서전)

安應七歷史

출생부터 하얼빈 의거와 재판까지 32년 생애를 스스로 기록한 자서전. '안응칠'은 그의 어릴 적 별명입니다. 담백한 문체 속에 동학 토벌, 천주교 입교와 삼혼설 설교, 곽 신부의 4대 방책, 의병 활동, 하얼빈 의거의 전말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

1910 (미완)

東洋平和論

한·청·일 삼국이 대등하게 연대해 평화를 이루자는 구상을 담은 논설. 서문과 전감(前鑑, 청일·러일전쟁의 교훈)까지 쓴 단계에서 형 집행으로 중단되었습니다. 남은 부분만으로도 공동 은행·공동 군대 등 근대적 지역 협력 구상의 씨앗이 엿보입니다.

본론(현상·복선·문답)은 집필되지 못한 미완의 저작입니다. 이후 전해지는 상세 구상 일부는 히라이시 법원장과의 면담 기록 등 다른 자료에서 보완된 것으로, 저술 본문과 구분해 읽어야 합니다.

옥중 유묵 (獄中遺墨)

1910 (여순 옥중)

遺墨

사형을 앞두고 비단과 종이에 써 남긴 200여 폭의 글씨. '견리사의 견위수명', '국가안위 노심초사',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위국헌신 군인본분'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왼손 약지가 잘린 장인(掌印, 손도장)이 함께 찍혀 있습니다.

각 유묵의 소장처·진위·수령자에 관해서는 학계·소장 기관의 고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별 작품의 세부 내력은 지정·소장 정보를 확인해 인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다시, 읽다

이분이 직접 쓴 문장입니다. 소리 내어 한 번 읽어 보세요 — 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合成散敗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변함없는 분명한 이치이다.
— 「『동양평화론』 서문
獨夫之患難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의 환난을 기필코 면하지 못할 것이다.
— 「『동양평화론』 전감(前鑑) 결미
국가란 몇몇 고관들의 것이 아니라 당당한 2000만 민족의 것입니다. 국민이 국민의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민권과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 「『안응칠 역사』
나는 정말 큰 죄인이다. 내 죄는 다른 죄가 아니라, 어질고 약한 한국 국민으로 태어난 죄이다.
— 「『안응칠 역사』 옥중 독백
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 「옥중 유묵 (『논어』 헌문편, 보물)

오늘 우리에게

AI 시대 — 연대·정의·평화의 설계자를 다시 읽는다

안중근을 '총을 든 사람'으로만 기억한다면 그의 절반만 보는 것입니다. 그는 세 나라의 공존을 설계하고, 이익 앞에서 의(義)를 묻고, 힘이 없을수록 스스로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 사상가였습니다. 진영과 국경을 넘는 협력이 절실하면서도 혐오와 분열이 손쉬워진 오늘, 그의 물음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다만 아래의 연결은 '확정된 정답'이 아니라 '함께 생각해 볼 실마리'로 제안되는 것임을 기억해 주세요.

동양평화 (삼국 연대)

국가·진영 갈등, 초국가적 협력의 위기

어느 한쪽의 지배가 아니라 대등한 공존을 설계한 그의 구상은, 기후·감염병·AI 규범처럼 홀로 풀 수 없는 문제 앞의 국제 협력을 되묻게 합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

이익·효율 앞에서 흔들리는 윤리

이익이 보일 때 먼저 '이것이 옳은가'를 묻는 태도. 성과와 편의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시대에 개인의 용기와 책임을 되새기게 합니다.

자강·실력양성

기술 자립과 자기주도 학습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원칙은, 남의 도구에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실력과 역량을 기르는 일 — 개인의 배움에도, 사회의 기술 자강에도 닿습니다.

국가는 2000만 민족의 것

무관심·냉소 vs 시민의 참여

'나 하나쯤이야'라는 냉소에 맞서, 공동체는 구성원의 의무 위에 선다는 그의 국가관은 오늘의 시민 참여를 묻는 자원입니다.

만국공법·정의로운 절차

규범에 기반한 질서, 공정한 재판

그는 형벌을 피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법정에서 판단받겠다'고 요구했습니다. 힘이 아니라 규범이 다투는 세계를 향한 오래된 호소입니다.

애종·인종을 넘는 화합

온라인 혐오·차별과 분열

같은 인종 사랑을 말하면서도 '이웃을 해치는 자는 독부가 된다'며 경계한 그의 균형은, 소속을 앞세운 혐오와 배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안중근을 소개할 때는 K-12 교보재로서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의 하얼빈 의거는 '폭력을 미화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국권을 빼앗긴 시대에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수행한 저항이자, 그 자신이 만국공법상 '정당한 전쟁 행위'로 규정하고 정식 재판을 요구한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의 궁극적 지향이 살상이 아니라 '동양평화'라는 공존의 질서였음을, 그리고 그가 적국의 포로마저 만국공법에 따라 풀어 주었다는 점을 함께 보아야 그의 사상이 온전히 전해집니다. 오늘의 한·일 관계 등 민감한 맥락에서는, 역사적 사실과 상대 국가·국민에 대한 존중을 함께 지키는 서술이 바람직합니다.

이제 당신 차례

이제, 안중근과 직접 만나보세요

당신은 일곱 개의 방을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안중근은 이익보다 의(義)를 앞세웠고, 총을 들면서도 세 나라의 평화를 꿈꾸었으며, 사형을 앞두고도 원한이 아니라 대세를 걱정하며 붓을 든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미화하기보다 담담히 사실을 기록했고, 적에게도 만국공법의 예를 지키려 했습니다. '바로 대화하기'에서 그가 당신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고 오세요

그대로 옮겨 적어도 됩니다.

  • '동양평화'는 결국 이루지 못한 꿈이었는데, 오늘의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하라(견리사의)고 하셨는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옳은 일을 해야 하나요?
  • 적국의 포로를 만국공법을 들어 풀어 주셨다는데, 그것이 정말 옳은 판단이었나요?
  • 스스로를 '살인자'가 아니라 '참모중장'이라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 '국가는 2000만 민족의 것'이라면, 평범한 한 사람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 죽음을 앞두고도 두렵지 않으셨나요? 신앙은 그때 어떤 힘이 되었나요?

선생님 · 담당자를 위한 안내

교과 어디에서 만나나요

한국사 근현대 '국권 피탈과 민족 운동' 단원의 핵심 인물이며, 도덕·윤리 교과에서는 정의·애국·공동체 가치의 대표 사례로 자주 다뤄집니다. 『동양평화론』은 동아시아 지역 협력·평화 사상의 선구로 별도로 조명됩니다.

안중근 교과 연계표
과목학년단원비중
중·고 한국사중3·고1국권 피탈과 항일 의병·의열 투쟁최빈출 ⭐⭐⭐
수능 한국사(필수)고31900년대 국권 수호 운동빈출
고 도덕/생활과 윤리고1-2정의·애국심·공동체와 개인빈출
통합사회고1평화·인권·동아시아 협력가끔
창의적 체험활동전학년인물 탐구·계기 교육(순국일 등)가끔

하얼빈 의거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국권 피탈에 맞선 저항'과 '동양평화라는 지향'의 맥락에서 지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