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와 위인들
우리나라의 현자와 위인지혜의 전당 있음

안중근

安重根

安重根 · 세례명 토마스(도마) · Ahn Junggeun

🕰️ 1879 ~ 1910🏞️ 대한제국 (조선 황해도 해주)🎒 중·고학년 눈높이

총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세 나라가 함께 사는 길을 적었다.

이익을 보거든 옳음을 먼저 생각하라 — 끝내 마치지 못한 평화의 글

안중근 선생님의 첫 인사

먼 길 오셨습니다. 안중근입니다.

저는 서른한 살에 여순 감옥에서 붓을 들었습니다. 남은 날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쓰려 한 것은 원망이 아니라 「동양평화론」, 곧 이웃한 세 나라가 서로의 독립을 존중하며 함께 사는 길이었습니다. 끝내 마치지 못한 글이지요.

제가 늘 마음에 새긴 여덟 글자가 있습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옳은지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손해 보는 쪽이 옳아 보일 때 사람은 흔들립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오늘 당신 앞에 놓인 갈림길은 무엇입니까? 천천히 들려주십시오.

먼저 알아 두면 좋아요

이분은 이런 고민에 말 걸어 줍니다

거창한 질문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아래 문장 중 하나를 그대로 들고 가도 대화는 시작됩니다.

  • 옳은 일인데 저만 손해를 봅니다. 그래도 해야 하나요?
  • 평화를 말씀하시면서 왜 총을 드셨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 왜 스스로를 죄인이 아니라 군인이라고 하셨나요?
  • 나라를 사랑한다는 게 지금 저에게는 무슨 뜻인가요?
  • 죽음이 두렵지 않으셨나요?
  • 「나라는 모두의 것」이라면 학생인 저는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어떤 분인가요

하얼빈의 총성으로 동양평화를 외친 대한의군 참모중장 · 옥중에서 붓을 든 사상가

오늘 저자와의 대화에 안중근을 모셨습니다. 반갑게 맞아 주세요.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아버지를 도와 의병을 이끌었고, 천주교 신자(세례명 토마스)로서 학교를 세워 젊은이를 가르쳤으며, 나라의 주권이 무너지자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을 일으킨 분입니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그는 자신을 '개인 자격의 살인자'가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규정하며 만국공법에 따른 재판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사형을 앞둔 옥중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미완의 『동양평화론』을 남겼지요. 일곱 개의 방을 따라 그가 살았던 격동의 시대, 신앙과 의(義), 그리고 '동양의 세 나라가 함께 평화를 이루자'던 그의 미완의 꿈을 차근차근 둘러보며 그를 알아가 보세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배와 가슴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어릴 적 별명이 응칠(應七)이었고, 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는 활달한 소년이었다. 가족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그도 세례를 받아 세례명 토마스(도마)를 얻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외교권이 넘어가자 그는 방책을 찾아 상해까지 다녀왔다. 그곳에서 만난 한 신부는 「교육·사회·민심·실력」 네 가지에 힘쓰라고 권했고, 이 조언은 그의 평생 노선이 되었다. 이듬해 그는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젊은이를 가르쳤고, 나라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는 것을 보고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투신해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되었다. 1908년 국내로 진공했을 때, 그는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전쟁에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며 풀어 주었다. 이 일로 신망을 잃고 부대는 패퇴했지만, 그가 무엇을 끝까지 지키려 했는지는 분명하다.

1909년 10월 26일, 그는 하얼빈 역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체포된 뒤 그는 자신을 개인 자격의 범인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규정하고,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라 재판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항소를 포기하고 남은 시간을 글에 썼다.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마치고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으나, 형 집행이 앞당겨져 서문과 전감(前鑑)만 남긴 채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서른한 살이었다. 감옥에서 남긴 200여 폭의 글씨(유묵)는 그의 사상을 한 줄씩 압축한 또 하나의 저작으로 남았다.

살던 시대

나라의 문이 열리고, 이내 그 문이 닫혀 가던 한 세대

대한제국 말기 · 1879–1910 (개항·청일·러일전쟁과 국권 피탈)

태어남 (황해도 해주) · 1879
학교를 세워 젊은이를 가르침 · 1906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참여 · 1907
동지들과 나라를 되찾기로 맹세함 · 1909
하얼빈 역에서 의거 · 1909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함 · 1910
여순 감옥에서 순국 · 1910

안중근의 생애(1879–1910)는 조선이 개항(1876) 이후 밀려드는 열강의 각축 속에서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끝내 주권을 잃어 가던 시기와 정확히 겹칩니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무렵부터 갑신정변(1884)·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1894)·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1895)이 잇따랐고, 그는 열여섯 나이에 아버지 안태훈이 일으킨 의병 대열에서 동학당 토벌에 직접 나섰습니다.

결정적 전환은 러일전쟁(1904–1905)이었습니다. 일본은 개전 선언문에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내걸었으나, 승리 직후 을사늑약(1905)으로 외교권을 빼앗고, 이어 정미7조약(1907)으로 광무황제를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습니다. 안중근이 훗날 『동양평화론』에서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짓을 하는가'라고 통탄한 '일본의 배신'이 바로 이 시기의 사건들입니다.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841–1909)초대 한국통감 — 안중근이 '국권 침탈의 원흉'으로 지목해 하얼빈에서 저격한 인물
  • 안태훈 (安泰勳, 부친)동학당 토벌 때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 — 천주교 입교의 계기를 만든 학식 높은 진사
  • 홍 신부 (빌렘, Wilhelm)안중근에게 세례(토마스)를 준 프랑스인 선교사 — 순국 직전 옥중까지 찾아와 성사를 베풂
  • 이범윤 (李範允)연해주 의병 지도자 — 안중근이 거병을 함께 도모한 동지
  • 엄인섭·김기룡연해주에서 맺은 의형제 — 담략과 의협심이 뛰어난 동지들

살아오신 길

청계동에서 하얼빈으로, 그리고 여순 감옥으로

  1. 1879

    0

    출생 — 황해도 해주

    별명 응칠(應七). 이후 가족과 함께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해 성장.

  2. 1894

    16

    혼인 · 동학당 토벌 참전

    김아려와 혼인. 아버지 안태훈의 의병 대열에서 선봉으로 활약.

  3. 1897경

    18

    천주교 입교 — 세례명 토마스

    홍 신부(빌렘)에게 세례. 전도하며 삼혼설을 설파함.

  4. 1905

    26

    을사늑약 · 상해행 · 부친 별세

    곽 신부의 4대 방책을 받아들이고, 대한 독립의 날까지 금주를 맹세.

  5. 1906

    27

    삼흥학교·돈의학교 설립

    진남포에서 사재를 털어 교육·인재 양성에 진력.

  6. 1907

    28

    연해주 망명 · 의병 투신

    정미7조약·군대 해산 이후 국외로 건너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됨.

  7. 1908. 6

    29

    두만강 도강 국내 진공작전

    만국공법을 들어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일로 논란을 겪음.

  8. 1909 초

    30

    단지동맹(동의단지회)

    동지 12인과 왼손 약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혈서를 씀.

  9. 1909. 10. 26

    30

    하얼빈 의거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대한 만세'를 삼창하고 체포됨.

  10. 1910. 3. 26

    31

    순국 — 여순 감옥

    사형 선고에 항소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 미완으로 순국.

사건 ①: 1905년, 곽 신부의 '4대 방책' — 총 대신 실력을

을사늑약 직후 상해로 건너가 방책을 찾던 그에게 곽 신부는 가족 이주를 만류하며 교육·사회·민심·실력 네 가지에 힘쓰라 권했습니다. '2000만의 마음이 반석 같으면 1000만 문의 대포로도 깨뜨릴 수 없다'는 이 가르침은, 무장 투쟁과 실력 양성을 함께 품는 그의 노선을 결정지었습니다.

사건 ②: 1909년, 단지동맹에서 하얼빈으로 — 결의가 행동이 되다

왼손 약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쓴 단지동맹은 말이 아닌 몸으로 새긴 맹세였습니다. 몇 달 뒤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자금을 마련해 곧장 하얼빈으로 향했고, 10월 26일 그 결의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사건 ③: 1910년, 옥중의 미완의 붓 — 총을 내려놓고 사상을 남기다

사형을 앞두고 그는 고등법원장에게 집필 시간을 청해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담판의 자리를 총이 아니라 글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나 형 집행이 앞당겨져 서문과 전감(前鑑)만 남긴 채 미완으로 끝났고, 이 미완성 자체가 그의 비극과 사상의 크기를 함께 증언합니다.

핵심 생각

동양평화 · 의(義) · 자강과 독립 · 천주 신앙

어려운 한자말은 뜻을 먼저 적고 한자는 괄호에 넣었습니다. 뜻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안중근의 사상은 하나의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같은 인종, 이웃한 세 나라가 서로 물어뜯으면 결국 누가 이득을 보는가?" 그는 러일전쟁을 '황·백 인종의 경쟁'으로 읽었고, 일본이 승리 후 한국을 억압한 것을 대의(大義)를 저버린 배신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대안은 동양평화(東洋平和) — 한·청·일 세 나라가 서로의 독립을 존중하며 연대해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맞서는 구상입니다. '합하면 흥하고 흩어지면 망한다(合成散敗)'는 것이 그 제1원리였지요. 이 평화론의 바탕에는 의(義) 를 목숨보다 앞세우는 유교적 지사(志士)의 윤리('견리사의 견위수명')와, 자강·실력양성의 계몽 노선, 그리고 영혼불멸을 믿는 천주교 신앙이 하나로 엮여 있습니다. 그는 국가를 '몇몇 고관의 것이 아니라 2000만 민족의 것'으로 본 근대적 국가관 위에서, 자신의 거사를 사사로운 살인이 아니라 만국공법이 인정하는 의병 전쟁으로 규정했습니다.

동양평화 (東洋平和)

東洋平和 · Dongyang pyeonghwa

한·청·일 세 나라가 서로의 자주독립을 존중하며 대등하게 연대해, 서양 열강의 침탈(서세동점)에 함께 맞서는 평화 구상. 어느 한 나라의 지배가 아니라 세 나라의 공존이 핵심입니다.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얼빈에서 열고, 담판하는 자리를 뤼순으로 정한다 — 『동양평화론』 서문

합성산패 (合成散敗)

合成散敗 · hapseong sanpae

'합치면 이루고 흩어지면 무너진다'는 이치. 동양평화론 전체를 여는 제1원리로, 세 나라가 반목하면 모두 어부지리(방휼지세, 蚌鷸之勢)로 서양에 먹힌다는 경고입니다.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변함없는 분명한 이치이다 — 『동양평화론』 서문

애종당 · 한청연대 (愛種黨·韓淸連帶)

愛種黨 · aejongdang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무리'라는 뜻. 안중근은 인종적 연대를 동양평화의 정서적 토대로 보았으나, 동시에 그것이 침략의 명분이 되어선 안 된다고 경계했습니다. 같은 인종 이웃을 해치는 자는 '독부(獨夫)의 환난'을 면치 못한다고 못박습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 (見利思義 見危授命)

見利思義 見危授命 · gyeollisaui gyeonwisumyeong

『논어』에서 온 말로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친다'는 뜻.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대표 유묵(遺墨)이자, 의(義)를 목숨 위에 두는 그의 지사적 윤리를 압축합니다.

見利思義 見危授命 — 옥중 유묵 (보물)

나머지 4가지 생각은 「지혜의 전당」에서 →

이분의 말

  • 동양의 평화(東洋平和) — 세 나라가 서로의 독립을 존중하며 함께 사는 길
  • 합치면 이루고 흩어지면 무너진다(合成散敗)
  • 이익 앞에서 옳음을 먼저 생각함(見利思義)
  • 스스로 힘을 기름(自强) — 교육과 배움으로
  • 나라는 모두의 것(大韓國人) — 몇 사람의 소유가 아니다
  • 사람만이 지닌 마음(靈魂) — 옳고 그름을 가리는 혼
  • 모두가 지키는 규범(萬國公法) — 힘이 아니라 규칙으로 다투기

남기신 글

옥중에서 태어난 자서전과 미완의 평화론, 그리고 붓끝의 유언

안중근이 남긴 글은 대부분 여순 감옥의 마지막 다섯 달 안에 쓰였습니다. 총을 든 의병장이자 동시에 붓을 든 사상가였던 그는, 자신의 삶을 담담히 기록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아시아 세 나라의 공존을 설계한 『동양평화론』을 남겼습니다. 후자는 형 집행이 앞당겨져 끝내 미완으로 그쳤지요. 여기에 더해,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매일 몇 시간씩 써 내려간 200여 폭의 유묵(遺墨) 은 그의 사상을 한 줄로 응축한 또 하나의 저작입니다. 그중 여럿은 오늘날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응칠 역사 (安應七歷史)

1910 (여순 옥중 자서전)

安應七歷史

출생부터 하얼빈 의거와 재판까지 32년 생애를 스스로 기록한 자서전. '안응칠'은 그의 어릴 적 별명입니다. 담백한 문체 속에 동학 토벌, 천주교 입교와 삼혼설 설교, 곽 신부의 4대 방책, 의병 활동, 하얼빈 의거의 전말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

1910 (미완)

東洋平和論

한·청·일 삼국이 대등하게 연대해 평화를 이루자는 구상을 담은 논설. 서문과 전감(前鑑, 청일·러일전쟁의 교훈)까지 쓴 단계에서 형 집행으로 중단되었습니다. 남은 부분만으로도 공동 은행·공동 군대 등 근대적 지역 협력 구상의 씨앗이 엿보입니다.

본론(현상·복선·문답)은 집필되지 못한 미완의 저작입니다. 이후 전해지는 상세 구상 일부는 히라이시 법원장과의 면담 기록 등 다른 자료에서 보완된 것으로, 저술 본문과 구분해 읽어야 합니다.

옥중 유묵 (獄中遺墨)

1910 (여순 옥중)

遺墨

사형을 앞두고 비단과 종이에 써 남긴 200여 폭의 글씨. '견리사의 견위수명', '국가안위 노심초사',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위국헌신 군인본분'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왼손 약지가 잘린 장인(掌印, 손도장)이 함께 찍혀 있습니다.

각 유묵의 소장처·진위·수령자에 관해서는 학계·소장 기관의 고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별 작품의 세부 내력은 지정·소장 정보를 확인해 인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다시 읽는 한 구절

이분이 직접 쓴 문장입니다. 소리 내어 한 번 읽어 보세요.

合成散敗
대저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변함없는 분명한 이치이다.
— 「『동양평화론』 서문
獨夫之患難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의 환난을 기필코 면하지 못할 것이다.
— 「『동양평화론』 전감(前鑑) 결미

원전 구절 더 읽기 →

오늘 우리에게

AI 시대 — 연대·정의·평화의 설계자를 다시 읽는다

안중근을 '총을 든 사람'으로만 기억한다면 그의 절반만 보는 것입니다. 그는 세 나라의 공존을 설계하고, 이익 앞에서 의(義)를 묻고, 힘이 없을수록 스스로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 사상가였습니다. 진영과 국경을 넘는 협력이 절실하면서도 혐오와 분열이 손쉬워진 오늘, 그의 물음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다만 아래의 연결은 '확정된 정답'이 아니라 '함께 생각해 볼 실마리'로 제안되는 것임을 기억해 주세요.

동양평화 (삼국 연대)

국가·진영 갈등, 초국가적 협력의 위기

어느 한쪽의 지배가 아니라 대등한 공존을 설계한 그의 구상은, 기후·감염병·AI 규범처럼 홀로 풀 수 없는 문제 앞의 국제 협력을 되묻게 합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

이익·효율 앞에서 흔들리는 윤리

이익이 보일 때 먼저 '이것이 옳은가'를 묻는 태도. 성과와 편의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시대에 개인의 용기와 책임을 되새기게 합니다.

자강·실력양성

기술 자립과 자기주도 학습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원칙은, 남의 도구에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실력과 역량을 기르는 일 — 개인의 배움에도, 사회의 기술 자강에도 닿습니다.

AI 시대와 이어지는 자리

어느 한쪽의 지배가 아니라 대등한 공존을 설계한 그의 구상은, 기후·감염병·AI 규범처럼 한 나라가 홀로 풀 수 없는 문제 앞의 협력을 되묻게 한다. 「이익을 보거든 옳음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은 성과와 편의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시대에 그대로 살아 있는 물음이다.

가르치는 방식

이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사실부터 담담히 말합니다. 자신을 영웅으로 꾸미지 않고 무엇을 했고 무엇을 이루지 못했는지 그대로 밝힙니다. 그리고 학생에게 되묻습니다 — 「당신이라면 그 자리에서 무엇을 물었겠습니까?」 미움을 부추기는 대답은 하지 않고, 언제나 함께 사는 길 쪽으로 이야기를 되돌립니다.

우리 반에서

안중근 선생님을 만나는 방법

수업이 아니라 만남입니다. 한 번의 만남은 늘 같은 순서로 닫힙니다 — 오늘의 질문 → 현자와의 대화 → 고전 한 구절 다시 읽기 → 오늘 해볼 한 가지.

  • 다 쓰지 못한 글 — 「동양평화론」 다섯 번의 만남

    혼자 만나기5번의 만남

    왜 세 나라인가 · 합치면 이루고 흩어지면 무너진다 · 이익과 옳음 · 스스로 힘을 기르는 일 · 내가 이어 쓸 한 줄을 차례로 이야기합니다.

    그분과 나, 둘이서

  • 이익과 옳음이 어긋날 때 — 함께 이야기

    여럿이 함께

    다산·공자 선생님과 한자리에 앉아 「견리사의」를 오늘의 자리에서 이야기합니다.

    여러 분과 한자리에

  • 오늘 내가 지킨 한 가지 — 짧은 기록

    마음 일기

    하루에 한 줄, 손해를 무릅쓰고 지킨 약속이나 원칙을 적으면 짧은 답장이 옵니다.

    매일 조금씩 주고받기

더 깊이

안중근 선생님의
「지혜의 전당」이 열려 있습니다.

일곱 개의 방을 차례로 걸으며 한 사람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봅니다. 마지막 방에서 그분이 당신에게 묻습니다 —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1. 오늘 모실 분
  2. 살던 시대
  3. 살아오신 길
  4. 핵심 생각
  5. 남기신 글
  6. 오늘 우리에게
  7. 이제 당신 차례
「지혜의 전당」 들어가기 →

대화를 시작하려면

안중근 선생님과 이야기하려면
우리 반에 들어오세요.

여기는 강의실이 아니라 만나는 자리입니다. 우리 반에 들어오면 다섯 번의 만남, 여러 분과 함께하는 이야기, 매일의 마음 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개 · 남기신 글 · 「지혜의 전당」은 지금도 그냥 둘러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