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벤담은 1748년 2월 15일, 런던 스피탈필즈(Spitalfields)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유복한 변호사(attorney)였고 할아버지도 변호사인 법률가 집안이었습니다. 그의 조숙함은 전설적입니다. 아직 걸음마를 뗀 아기였을 때 아버지 책상에서 여러 권짜리 영국사를 읽는 것이 발견되었고, 세 살에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바이올린·하프시코드·피아노·오르간까지 능숙하게 다루었습니다. 어머니 쪽의 경건한 신앙과 아버지 쪽의 계몽주의적 합리주의가 뒤섞인 집에서 자란 이 아이는, 훗날 종교의 미신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이성과 명료함을 무엇보다 중시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꿈은 원대했습니다. 그는 눈부신 아들이 언젠가 대법관(Lord Chancellor)이 되리라 믿고 그 길로 밀어붙였습니다. 벤담은 1760년, 열두 살에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Queen's College)에 입학해 1764년 졸업했고, 런던의 법학원 링컨스 인(Lincoln's Inn)에서 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법을 배우던 벤담은 깊은 환멸에 빠집니다. 특히 당대 최고의 법학 권위자 윌리엄 블랙스톤의 강의를 듣고, 영국 법이 낡고 모순되며 '허구(fiction)'로 가득 찼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결단합니다 — 변호사 자격을 얻고도 법정에 서지 않고, 법을 실천하는 대신 법에 관해 쓰기로 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배신이었지만, 인류에게는 근대 법 개혁과 공리주의의 출발점이었습니다.
1776년, 스물여덟의 벤담은 첫 주요 저작 『정부론 단편』을 익명으로 펴내 공리(utility)를 행위와 법의 지도 원리로 처음 공표합니다. 이 책을 계기로 뒷날 총리가 되는 셸번 백작과 연을 맺었지만, 그의 사상은 정작 생전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785년 벤담은 러시아의 동생 새뮤얼을 찾아가, 동생이 고안한 원형 감시 작업장을 감옥 설계로 발전시킵니다. 이것이 파놉티콘(Panopticon)입니다. 그는 이 구상에 진심이어서, 1788년 귀국 후 약 20년간 자기 돈까지 쏟아부으며 실제 건설을 위해 정부를 설득했지만, 결국 좌절하고 1812~1813년경 약 2만 3천 파운드의 보상금만 받은 채 계획을 접어야 했습니다.
1789년, 그는 최대 이론적 저작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을 출판합니다(인쇄는 1780년).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로 시작하는 이 책에는 공리의 원리, 쾌락 계산, 그리고 그 유명한 동물 각주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1792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벤담은 재정적으로 독립했고, 웨스트민스터에서 거의 40년을 은둔하며 오직 쓰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여든이 넘어서까지 하루 열 장에서 스무 장씩 써서, 오늘날 UCL에는 약 10만 페이지의 원고가 남아 있습니다. 그는 필요하면 단어까지 만들어 내어, 'international(국제적)'·'maximize'·'minimize'·'codification' 같은 말이 그의 발명품입니다.
1808~09년경 벤담은 제임스 밀을 만나 '철학적 급진파'의 중심이 되며 정치적으로 급진화합니다. 그는 당대로서는 대단히 앞선 것들을 옹호했습니다 — 보통선거와 비밀투표, 민주주의에 대한 공리주의적 정당화, 동성애의 비범죄화, 동물 복지, 감옥·빈민 구제 개혁까지. 만년의 1830년 『헌법전』은 그 평생의 개혁 사상을 대의 민주주의의 청사진으로 결정(結晶)한 저작입니다. 그리고 1832년 6월 6일, 평생 주장한 선거법 개정이 국왕 재가를 받기 하루 전날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자기 시신을 해부·보존해 '오토아이콘'으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오토아이콘은 지금도 UCL 학생회관에 앉아 있습니다.
사건 ①: 블랙스톤에 대한 환멸 — 안전한 성공을 버리다
아버지의 각본은 완벽했습니다. 열두 살에 옥스퍼드, 이어 법학원, 그리고 언젠가 대법관. 그러나 법을 배우던 벤담은 당대 최고 권위자 블랙스톤의 강의에서 영국 법이 '낡고 모순되며 허구투성이'임을 보았습니다. 그는 변호사 자격을 얻고도 법정에 서기를 거부하고, 낡은 법을 비판하고 다시 설계하는 험로를 택합니다. '실패한 법률가'가 아니라 법 체계 자체에 대한 확신 있는 거부였고, 이것이 그의 평생 과업의 출발점이 됩니다.
사건 ②: 파놉티콘 — 20년과 재산을 삼킨 감옥의 꿈
1785년 러시아에서 얻은 감시의 집 구상에 벤담은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이 감옥이 잔혹한 처벌을 줄이고 교화와 효율을 높이는 '더 인도적인 개혁 시설'이 되리라 믿으며, 20년간 자기 돈까지 쏟아부어 정부를 설득했습니다. 감옥 부엌에서 쓸 저비용 고영양 요리법까지 재료비를 계산해 준비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계획은 끝내 좌절했고, 보상금만 받은 채 접어야 했습니다. 훗날 이 실패한 감옥은 푸코를 거쳐 감시 사회를 논하는 가장 유명한 은유가 됩니다.
사건 ③: 오토아이콘 — 죽어서도 던진 마지막 질문
무신론자였던 벤담은 교회 묘지에 묻히기를 거부하고, 자기 시신을 외과의사에게 해부하게 한 뒤 뼈대에 옷을 입혀 '오토아이콘(스스로가 자신의 초상)'으로 보존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UCL은 이를, 그가 대중에게 마지막 철학적 질문 — '왜 종교가 삶과 죽음에 관한 사회적 관념을 결정하는가' — 을 던지려 한 것으로 풀이합니다(확정된 사실이 아닌 유력한 추정). 죽어서도 대학 복도에 앉아 있는 이 기이한 존재는 그의 삶에 어울리는 마지막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