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모실 분

백성을 어엿비 여겨 스물여덟 자를 지은 임금 · 애민(愛民)과 자주(自主)의 성군

세종대왕 초상

世宗 · 1397 ~ 1450

오늘 저자와의 대화에 세종대왕을 모셨습니다. 반갑게 맞아 주세요. 그는 조선의 네 번째 임금으로, 왕위를 물려받으리라 예정되지 않은 셋째 아들이었으나 스물둘에 즉위해 서른두 해를 다스린 분입니다. 학자를 기르는 집현전을 열고, 하늘의 별과 비와 시간을 재는 과학을 일으켰으며, 무엇보다 글을 모르는 백성이 제 뜻을 펴지 못함을 '어엿비 여겨' 세상에 없던 문자 훈민정음을 손수 지었습니다. 일곱 개의 방을 따라 그가 살았던 시대, 왕이 되기까지의 길, '나랏말ᄊᆞ미 中國에 달아…'로 시작하는 애민의 사상, 그리고 최만리의 거센 반대를 넘어 백성의 글자를 세상에 내놓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둘러보며 그를 알아가 보세요.

여기서부터 일곱 개의 방이 이어집니다. 천천히 걸어 내려가면, 마지막 방에서 그분이 당신에게 묻습니다.

살던 시대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고, 문화와 과학이 절정에 오르던 한 세대

조선 초기 · 15세기 전반 (건국 반세기,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던 황금기)

세종의 생애(1397–1450)는 조선이 건국(1392)된 지 겨우 반세기, 새 왕조의 제도와 문물이 빠르게 정비되던 시기였습니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세웠고,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왕권을 다졌습니다. 세종이 물려받은 것은 피의 대가로 안정된 강력한 왕권과, 아직 채워야 할 빈 제도의 틀이었습니다. 그는 창업(創業)의 시대를 이어 수성(守成)과 문치(文治)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性理學)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던 때입니다.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로 나라를 다스리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이 국시였고, 명나라를 큰 나라로 섬기는 사대(事大)가 외교의 기본 틀이었습니다. 최만리 등 사대부가 훈민정음을 '오랑캐의 일'이라며 반대한 것도, 중화(中華)의 문자인 한자를 버리는 것이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는 이 시대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종은 이 틀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말은 중국과 다르다(國之語音異乎中國)'는 자주(自主)의 자각을 문자로 밀고 나갔습니다.

밖으로는 북쪽의 여진과 남쪽의 왜(倭)가 국경을 위협했습니다. 세종은 즉위 이듬해 상왕 태종의 뜻에 따라 왜구의 소굴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했고, 김종서·최윤덕을 보내 압록강·두만강 유역에 사군육진(四郡六鎭)을 개척해 오늘날 한반도의 북쪽 경계를 확정했습니다. 안으로는 백성의 삶을 살피는 정치를 폈으니, 세금 제도를 고칠 때 전국 17만여 명에게 찬반을 묻는 여론조사를 시행한 것은 이 시대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

  • 태종 이방원 (1367–1422)아버지 — 강력한 왕권을 다져 물려주고, 즉위 후 4년간 상왕으로 군권을 뒷받침한 임금
  • 소헌왕후 심씨 (1395–1446)왕비 — 8남 2녀를 함께 기른 부인. 친정 아버지 심온이 태종에게 사사되는 비극을 겪음
  • 황희 (1363–1452)18년을 함께한 명재상 — 세종 치세를 떠받친 정승의 상징
  • 장영실 (생몰 미상)관노 출신의 과학자 — 자격루·앙부일구·간의를 만든 손. 신분을 넘어 등용됨
  • 정인지 (1396–1478)집현전 대제학 — 훈민정음 해례본과 용비어천가·고려사 편찬을 이끈 학자
  • 최만리 (?–1445)집현전 부제학 — 언문 창제에 정면으로 반대 상소를 올린 인물(존경받는 청백리이자 사상적 논적)

살아오신 길

셋째 아들에서 성군으로 — 준수방에서 영응대군 집까지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 1397년 한양 준수방(오늘날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일대)에서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두 형(양녕대군·효령대군)이 있었으니, 본래 왕위와는 거리가 먼 자리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지나치게 좋아해 병이 날 정도로 읽었고, 아버지 태종이 책을 거두어 감추자 병풍 뒤에 떨어진 책 한 권을 수백 번 되풀이해 읽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1408년 열두 살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심온의 딸(뒷날 소헌왕후)과 혼인했습니다.

왕위 계승은 극적이었습니다. 세자였던 맏형 양녕대군이 거듭 방탕한 행실로 물의를 일으키자, 1418년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셋째 충녕대군을 새 세자로 세웁니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은 스스로 상왕으로 물러나며 스물두 살의 세종에게 왕위를 넘깁니다. 다만 군사권만은 상왕이 4년간 쥐고 있었으니, 즉위 이듬해의 대마도 정벌도 실제로는 상왕 태종의 결단이었습니다. 1422년 태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세종은 온전한 임금이 됩니다.

세종은 신하와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경연(經筵)을 거의 매일 열었고, 1420년 궁궐 안에 집현전(集賢殿)을 확대 개편해 젊은 인재를 모아 학문과 정책 연구에 전념하게 했습니다. 유능한 학자에게는 휴가를 주어 책만 읽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까지 두었습니다. 그가 신분이 미천한 장영실을 등용해 자격루·앙부일구를 만들게 한 것도, 사람을 그 재주로 쓰는 이 시대의 열린 인재관을 보여 줍니다.

그의 가정사에는 깊은 그늘도 있었습니다. 즉위 직후 장인 심온이 태종에 의해 역모 혐의로 사사(賜死)되었고, 아내 소헌왕후는 국모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친정의 몰락을 견뎌야 했습니다. 세종은 8남 2녀를 두었으나, 만년에는 왕후와 몇몇 자식을 앞세우는 슬픔을 겪습니다. 1446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그 명복을 빌며 아들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을 짓게 하고 자신은 친히 『월인천강지곡』을 지었습니다.

세종은 안질(眼疾)·소갈(消渴, 당뇨) 등 여러 병을 앓았습니다. 눈이 어두워 지척의 사람도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고, 청주 초정약수를 찾아 요양하기도 했습니다. 병이 깊어지자 세자(뒷날 문종)에게 정사를 대신 보게 하는 대리청정을 맡겼습니다. 1450년, 재위 32년째 되던 해에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향년 54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훈민정음 반포로부터 4년 뒤였습니다.

한 사람의 한평생

  1. 1397

    0

    출생 — 한양 준수방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이름은 이도(李祹). 본래 왕위 계승과 거리가 멀었음.

  2. 1408

    12

    충녕군 봉작 · 소헌왕후와 혼인

    심온의 딸(뒷날 소헌왕후 심씨)과 가례를 올림.

  3. 1418

    22

    즉위 — 태종의 양위

    형 양녕대군이 폐세자되며 세자가 된 지 두 달 만에 왕위에 오름. 군권은 상왕 태종이 4년간 유지.

  4. 1419

    23

    대마도 정벌(기해동정)

    왜구의 근거지 대마도를 정벌. 이종무가 출정했으나 실제 결단은 상왕 태종.

  5. 1420

    24

    집현전 확대 개편

    궁중에 학문 연구기관을 두어 젊은 인재를 양성. 훈민정음·용비어천가·과학의 산실이 됨.

  6. 1430

    34

    공법 여론조사

    새 세금 제도(공법)의 찬반을 전국 17만여 명에게 물음. 하정상달의 대표적 실천.

  7. 1441

    45

    측우기 제작 · 과학의 전성기

    세계 최초의 표준 우량계. 간의대·자격루·앙부일구·칠정산 등 천문 과학이 절정에 이름.

  8. 1443

    47

    훈민정음 창제(28자)

    세종이 친히 스물여덟 글자를 지음(『세종실록』 25년 12월조: 上親制諺文二十八字).

  9. 1444

    48

    갑자상소 — 최만리 등의 언문 반대

    집현전 학자 7인이 창제 반대 상소를 올림. 세종이 조목조목 직접 반박(친답).

  10. 1446

    50

    훈민정음 반포(해례본) · 소헌왕후 승하

    제자 원리를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내며 새 문자를 세상에 알림. 같은 해 왕비를 여읨.

  11. 1450

    54

    별세 — 재위 32년

    여러 병환 끝에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 뒤에 '동방의 요순(堯舜)'으로 일컬어짐.

사건 ①: 1418년, 뜻밖의 즉위와 집현전 — 왕이 학자를 기르다

셋째 아들이었던 그는 형의 폐세자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종은 이 뜻밖의 자리를 학문의 정치로 채웠습니다. 집현전을 열어 젊은 학자를 모으고 거의 매일 경연에서 함께 토론했으며, 신분이 낮은 장영실까지 재주로 등용했습니다. '사람을 길러 나라를 다스린다'는 그의 방식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건 ②: 1443–1446년, 훈민정음 — 반대를 넘어선 백성의 문자

한자를 모르는 백성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을 '어엿비 여겨' 세종은 손수 스물여덟 자를 지었습니다. 최만리 등 집현전 학자들이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 '오랑캐의 일이다'라며 정면으로 반대했지만, 세종은 '이것이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便民)이 아니냐'고 조목조목 되물으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통치자가 반대를 무릅쓰고 피지배자를 위한 도구를 만든, 세계사에 드문 사건입니다.

사건 ③: 1430년, 공법 여론조사 — 왕이 백성 17만에게 묻다

세금 제도를 바꾸려던 세종은 곧바로 시행하지 않고, 관리부터 일반 백성까지 전국 17만여 명에게 새 법의 찬반을 물었습니다. 찬성이 많았음에도 반대가 큰 지역의 사정을 살펴 14년에 걸쳐 제도를 다듬었습니다. '아랫사람의 사정이 위에 닿게 한다(下情上達)'는 소통의 정치가 구체적 제도로 나타난 순간이었습니다.

세종대왕 표준영정 —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의 어진

현존하는 세종의 어진이 없어, 1973년 김기창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으로 그의 모습을 짐작합니다.

출처: 표준영정 · 저작 표기

핵심 생각

애민 · 자주 · 실용(便民) · 하정상달 · 흠휼

세종의 사상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실천의 철학입니다. 그 뿌리에는 유교 정치의 이상인 민본(民本) —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생각 — 이 있지만, 세종은 이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憫然·어엿비 너기다)'이라는 애민(愛民)의 정서로까지 밀고 들어갑니다. 훈민정음 창제의 세 목적으로 흔히 꼽히는 자주(自主)·애민(愛民)·실용(便民)이 그의 생각을 압축합니다. '우리말은 중국과 다르다'는 자주의 자각, '어린(어리석은=글 모르는) 백성을 어엿비 여긴다'는 애민,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편히 쓰게 한다'는 실용이 그것입니다. 이 정신은 문자에 그치지 않고 세금(공법 여론조사)·형벌(흠휼)·과학(측우기·칠정산)·복지(의창·양로연)로 두루 뻗어, 백성의 삶에 실제로 닿는 것만을 참된 다스림으로 여기는 하나의 통치 철학을 이룹니다.

어려운 한자말이 나와도 겁내지 마세요. 뜻을 먼저 적어 두었습니다. 뜻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애민 (백성을 어엿비 여김)

愛民 · 憫然 · aemin · minyeon

백성을 자식처럼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 세종은 훈민정음 어제 서문에서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가엾이) 여겨(予爲此憫然)'라 하여, 통치의 출발점을 백성의 딱한 처지에 대한 공감에 두었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 『훈민정음』 어제 서문

자주 (우리말·우리글의 주체성)

自主 · 國之語音異乎中國 · jaju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다르다는 자각. 사대(事大)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말소리에 맞는 우리의 글자가 필요하다는 문화적 주체 의식을 문자로 실현했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실용·편민 (쉽게 익혀 날마다 씀)

便民 · 欲使人人易習 · pyeonmin

누구나 쉽게 배워 일상에서 편히 쓰게 한다는 실용 정신. 훈민정음의 목표는 학문의 과시가 아니라 '사람마다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함'이었습니다. 이 실용주의는 측우기·자격루 같은 백성의 삶에 쓰이는 과학으로도 나타납니다.

사람마다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훈민정음』 어제 서문

하정상달·공론 (아래의 사정이 위에 닿음)

下情上達 · 詢問 · hajeong-sangdal

아랫사람(백성)의 형편과 뜻이 위(임금)에게 전해지게 하는 소통의 정치. 세종은 새 세법을 정하며 17만여 명의 찬반을 물었고(詢問民望), 공론(公論)을 존중해 반대가 큰 곳의 사정을 거듭 살폈습니다.

흠휼·휼형 (형벌을 삼감)

欽恤 · 恤刑 · heumhyul

형벌을 신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룸. 세종은 사형에 반드시 세 번 심리하는 **삼복법(三覆法)**을 정하고, 감옥의 처우를 개선하며,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살폈습니다. 애민이 사법 영역에서 구체화된 원리입니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 (천지자연의 이치)

象形 · 加畫 · 三才 · sanghyeong · gahoek · samjae

글자를 만든 과학적 원리.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고(상형), 소리가 세지면 획을 더하며(가획), 모음은 하늘(ㆍ)·땅(ㅡ)·사람(ㅣ) 삼재(三才)를 본떴습니다. 소리의 이치를 음양오행으로 풀어낸, 세계에서 유례없이 만든 원리가 밝혀진 문자입니다.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다(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 정인지 서문

예악 (음악으로 다스림)

禮樂 · 雅樂 · yeak

예(禮)와 악(樂)으로 백성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조화를 이룬다는 유교의 이상. 세종은 박연에게 아악(雅樂)을 정비하게 하고, 소리의 길이까지 적을 수 있는 유량악보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해 우리 음악의 틀을 세웠습니다.

남기신 글

한 임금이 남긴 문자와 노래 — 백성의 글로 쓰인 첫 책들

세종이 남긴 것은 한 사람의 저술이 아니라 한 시대의 문화 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 없던 문자 훈민정음을 지었고, 그 문자가 실제로 쓰인 첫 책들을 펴냈습니다. 새 왕조의 정당성을 우리말 노래로 읊은 『용비어천가』, 부처의 공덕을 기린 『월인천강지곡』은 훈민정음으로 간행된 최초의 문헌입니다. 그 밖에도 한자음을 바로잡은 『동국정운』, 우리 실정에 맞는 의학서 『향약집성방』, 농사 지침서 『농사직설』, 역사서 『고려사』, 역법서 『칠정산』이 모두 그의 재위에 편찬되었습니다. (『용비어천가』·『동국정운』 등은 세종이 친히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명으로 신하들이 편찬한 것으로, 세종 친제(親制)인 훈민정음·월인천강지곡과 구분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1443년 창제 / 1446년 반포

訓民正音 (解例本)

세종이 친히 지은 스물여덟 자와, 집현전 학자들이 그 원리를 풀이한 해설서. '어제 서문'과 예의(例義)에 이어, 제자해·초성해·중성해 등 해례(解例)와 정인지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글자를 만든 원리를 스스로 밝힌, 세계에서 유례없는 문자 창제 기록입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용비어천가

1445년 창작 / 1447년 간행

龍飛御天歌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125장의 서사시이자 악장.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 '해동 육룡(海東六龍)'의 사적을 읊었습니다. 훈민정음으로 간행된 최초의 책으로, 제2장 '뿌리 깊은 나무…'가 특히 유명합니다.

세종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정인지·권제·안지 등이 어명으로 편찬했습니다. 새 왕조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목적의 작품이라는 점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월인천강지곡

1447년경 (세종 친제)

月印千江之曲

세종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며 부처의 공덕을 기려 친히 지은 찬불가. '달(月)이 천 개의 강(千江)에 비친다'는 제목처럼, 하나의 진리가 온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유교 국가의 임금이 지은 불교 노래로, 세종의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보여 줍니다.

동국정운

1448년 간행

東國正韻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표준화한 운서(韻書). 신숙주·성삼문 등이 어명으로 편찬했으며, 새로 만든 훈민정음으로 한자음을 표기한 최초의 시도입니다.

다시, 읽다

이분이 직접 쓴 문장입니다. 소리 내어 한 번 읽어 보세요 — 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훈민정음』 어제 서문 (한문)
나·랏〮말〯ᄊᆞ·미〮 中듀ᇰ國·귁·에〮 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 서르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ᆡ〮 … 내〮 이〮ᄅᆞᆯ〮 為·윙〮ᄒᆞ·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ᄍᆞᆼ·ᄅᆞᆯ〮 ᄆᆡᇰᄀᆞ·노·니〮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 「『훈민정음』 언해본 (세종어제훈민정음)
불·휘 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ᆡ 곶 :됴·코 여·름 ·하ᄂᆞ·니 / :ᄉᆡ·미 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 내·히 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아니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느니라.
— 「『용비어천가』 제2장 (중세국어)
予老來難以消日, 以書籍爲友耳. … 如其便民也, 則今之諺文, 亦不爲便民乎?
내가 늘그막에 소일하기 어려워 서적을 벗삼을 뿐이다. … 만일 (이두가)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 또한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 「『세종실록』 26년(1444) — 최만리 상소에 대한 세종의 친답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字,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다. 그래서 옛사람이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뜻을 통하게 하고 삼재(하늘·땅·사람)의 도를 실었다.
—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

오늘 우리에게

AI 시대 — 애민·자주·소통을 다시 읽는다

약 600년 전의 세종이 오늘 청소년에게 말을 겁니다. 그가 훈민정음에 담은 '누구나 쉽게 익혀 제 뜻을 펴게 한다'는 생각은, 정보와 기술이 넘치는 만큼 그 격차도 커진 오늘날 오히려 더 절실합니다. 다만 세종의 통찰을 현대의 쟁점과 잇는 것은 '확정된 정답'이 아니라 '생각의 실마리'로 제시되는 것임을 기억해 주세요.

애민 (백성을 어엿비 여김)

디지털 격차 · 기술 소외

훈민정음은 '글 몰라 억울한 사람'을 위한 기술이었습니다. AI를 쓸 줄 몰라 뒤처지는 사람을 어떻게 살필지 —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묻는 자원입니다.

자주 (國之語音異乎中國)

AI 주권 · 한국어 데이터

'우리말은 다르다'며 우리 문자를 만든 정신은, 거대 외국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말을 잘하는 우리 AI, 우리 데이터의 주권'을 생각하게 합니다.

실용·편민 (欲使人人易習)

접근성 · 보편 설계(UX)

'누구나 쉽게'는 오늘의 접근성·유니버설 디자인 정신 그대로입니다. 어려운 기술을 가장 약한 사용자도 쓸 수 있게 만드는 일의 원형입니다.

하정상달 (17만 여론조사)

집단지성 · 디지털 숙의민주주의

세종은 세법을 정할 때 백성 17만에게 물었습니다. 온라인 공론·집단지성으로 함께 정책을 만드는 오늘의 실험에 600년 앞선 선례입니다.

흠휼 (형벌을 삼감)

알고리즘 판결 · AI 사법의 신중함

사형을 세 번 심리한(삼복법) 세종의 신중함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사람을 판단하는 시대에 '기계의 결정을 얼마나 믿어도 되는가'를 되묻게 합니다.

집현전 (인재를 길러 함께)

인간-AI 협업 · 융합 연구

왕과 학자, 기술자(장영실)가 신분을 넘어 협력한 집현전은, 사람과 사람이 — 그리고 사람과 AI가 — 함께 지식을 만드는 협업의 오래된 모델입니다.

세종을 흠 없는 위인으로만 그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의 애민은 신분제(양천제)와 노비제를 유지하는 틀 안의 애민이었고, 대외적으로는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事大)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훈민정음의 창제 주체를 두고, 원전 기록(『훈민정음』 해례본과 『세종실록』의 '上親制')과 다수 학자는 세종의 친제(親制)로 보지만, 집현전 학자들의 협찬(協贊)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어 학계에 논의가 이어집니다. 측우기는 세종의 명으로 제작되었으나 세자(뒷날 문종)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세종 개인의 발명'으로 단정하기보다 그가 이끈 과학 정책의 성과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런 한계와 논쟁을 함께 아는 것이, 세종을 더 깊이 이해하는 길입니다.

이제 당신 차례

이제, 세종대왕과 직접 만나보세요

당신은 일곱 개의 방을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세종은 왕이 되리라 예정되지 않았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학자를 기르고 하늘을 재고 음악을 바로잡았으며, 무엇보다 글 모르는 백성을 '어엿비 여겨' 세상에 없던 문자를 손수 지은 임금입니다. 그는 높은 자리에서 명령하기보다 먼저 백성의 사정을 묻고, 반대하는 신하의 말에도 조목조목 답하며 함께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바로 대화하기'에서 그가 당신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고 오세요

그대로 옮겨 적어도 됩니다.

  • 글자를 만드는 데 신하들이 그렇게 반대했는데, 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나요?
  • '백성을 어엿비 여긴다'는 마음은 오늘날 어떤 정치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 세금을 정할 때 17만 명에게 물으셨다는데, 다수결과 좋은 정치는 같은 건가요?
  • 임금이면서도 부처를 기리는 노래(월인천강지곡)를 지으셨어요.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려면요?
  • 장영실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을 등용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 우리말은 중국과 다르다고 하셨는데, 지금 AI 시대에 '우리 것'을 지킨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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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국어에서 가장 폭넓게 다뤄지는 인물입니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와 어제 서문은 중·고 국어와 국어사의 핵심이고, 조선 전기 정치·과학·문화의 대표 사례로 한국사에 두루 나옵니다.

세종대왕 교과 연계표
과목학년단원비중
중·고 한국사중2-3·고1조선 전기 — 세종의 민본·과학·대외정책최빈출 ⭐⭐⭐
중·고 국어(국어사)중3·고1훈민정음 어제 서문·창제 원리(상형·가획·삼재)최빈출 ⭐⭐⭐
고 문학고1-2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악장)빈출
중·고 도덕/윤리중·고민본·애민·소통의 리더십빈출
초등 사회초5-6한글을 만든 세종·우리 문화유산빈출

10월 9일 한글날은 훈민정음 해례본 반포(1446년 음력 9월 상순)를 양력으로 환산해 정한 국경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