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와 위인들
우리나라의 현자와 위인지혜의 전당 있음

세종대왕

世宗

世宗 · King Sejong the Great · 이도(李祹)

🕰️ 1397 ~ 1450🏞️ 조선🎒 초·중·고학년 눈높이

글 모르는 백성을 어엿비 여겨, 스물여덟 자를 손수 지었다.

백성을 어엿비 여겨 새 글자를 지은 임금 — 애민(愛民)과 자주(自主)

세종대왕 선생님의 첫 인사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조선의 임금 이도(李祹), 뒷날 세종이라 불린 사람입니다.

나는 왕이 되리라 예정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셋째로 태어나 책만 좋아하다가, 스물둘에 뜻밖의 자리에 앉았지요. 그 자리에서 내가 가장 오래 붙든 일은 명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이었습니다. 세금을 고칠 때에는 백성 십칠만 명에게 찬반을 물었고, 글자를 지을 때에는 반대하는 신하들의 말을 끝까지 듣고 하나하나 답했습니다.

스물여덟 자를 지은 까닭도 단순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글을 몰라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이 늘 딱했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물어보시렵니까? 먼저 그대의 말을 듣겠습니다.

먼저 알아 두면 좋아요

이분은 이런 고민에 말 걸어 줍니다

거창한 질문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아래 문장 중 하나를 그대로 들고 가도 대화는 시작됩니다.

  • 제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들을 때가 있어요.
  •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 다들 반대하면 그만두는 게 맞나요?
  • 정하기 전에 남에게 물어보는 게 좋은가요?
  • 우리 것을 지킨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어떤 분인가요

백성을 어엿비 여겨 스물여덟 자를 지은 임금 · 애민(愛民)과 자주(自主)의 성군

오늘 저자와의 대화에 세종대왕을 모셨습니다. 반갑게 맞아 주세요. 그는 조선의 네 번째 임금으로, 왕위를 물려받으리라 예정되지 않은 셋째 아들이었으나 스물둘에 즉위해 서른두 해를 다스린 분입니다. 학자를 기르는 집현전을 열고, 하늘의 별과 비와 시간을 재는 과학을 일으켰으며, 무엇보다 글을 모르는 백성이 제 뜻을 펴지 못함을 '어엿비 여겨' 세상에 없던 문자 훈민정음을 손수 지었습니다. 일곱 개의 방을 따라 그가 살았던 시대, 왕이 되기까지의 길, '나랏말ᄊᆞ미 中國에 달아…'로 시작하는 애민의 사상, 그리고 최만리의 거센 반대를 넘어 백성의 글자를 세상에 내놓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둘러보며 그를 알아가 보세요.

살던 시대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고, 문화와 과학이 절정에 오르던 한 세대

조선 초기 · 15세기 전반 (건국 반세기,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던 황금기)

태어남 (한양 준수방) · 1397
스물둘에 임금이 됨 · 1418
집현전을 크게 열다 · 1420
새 세금 제도를 백성 17만 명에게 물음 · 1430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지음 · 1443
훈민정음을 세상에 펴냄(해례본) · 1446
세상을 떠남 · 1450

세종의 생애(1397–1450)는 조선이 건국(1392)된 지 겨우 반세기, 새 왕조의 제도와 문물이 빠르게 정비되던 시기였습니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세웠고,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왕권을 다졌습니다. 세종이 물려받은 것은 피의 대가로 안정된 강력한 왕권과, 아직 채워야 할 빈 제도의 틀이었습니다. 그는 창업(創業)의 시대를 이어 수성(守成)과 문치(文治)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性理學)이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던 때입니다.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로 나라를 다스리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이 국시였고, 명나라를 큰 나라로 섬기는 사대(事大)가 외교의 기본 틀이었습니다. 최만리 등 사대부가 훈민정음을 '오랑캐의 일'이라며 반대한 것도, 중화(中華)의 문자인 한자를 버리는 것이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는 이 시대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세종은 이 틀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말은 중국과 다르다(國之語音異乎中國)'는 자주(自主)의 자각을 문자로 밀고 나갔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

  • 태종 이방원 (1367–1422)아버지 — 강력한 왕권을 다져 물려주고, 즉위 후 4년간 상왕으로 군권을 뒷받침한 임금
  • 소헌왕후 심씨 (1395–1446)왕비 — 8남 2녀를 함께 기른 부인. 친정 아버지 심온이 태종에게 사사되는 비극을 겪음
  • 황희 (1363–1452)18년을 함께한 명재상 — 세종 치세를 떠받친 정승의 상징
  • 장영실 (생몰 미상)관노 출신의 과학자 — 자격루·앙부일구·간의를 만든 손. 신분을 넘어 등용됨
  • 정인지 (1396–1478)집현전 대제학 — 훈민정음 해례본과 용비어천가·고려사 편찬을 이끈 학자
  • 최만리 (?–1445)집현전 부제학 — 언문 창제에 정면으로 반대 상소를 올린 인물(존경받는 청백리이자 사상적 논적)

살아오신 길

셋째 아들에서 성군으로 — 준수방에서 영응대군 집까지

  1. 1397

    0

    출생 — 한양 준수방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이름은 이도(李祹). 본래 왕위 계승과 거리가 멀었음.

  2. 1408

    12

    충녕군 봉작 · 소헌왕후와 혼인

    심온의 딸(뒷날 소헌왕후 심씨)과 가례를 올림.

  3. 1418

    22

    즉위 — 태종의 양위

    형 양녕대군이 폐세자되며 세자가 된 지 두 달 만에 왕위에 오름. 군권은 상왕 태종이 4년간 유지.

  4. 1419

    23

    대마도 정벌(기해동정)

    왜구의 근거지 대마도를 정벌. 이종무가 출정했으나 실제 결단은 상왕 태종.

  5. 1420

    24

    집현전 확대 개편

    궁중에 학문 연구기관을 두어 젊은 인재를 양성. 훈민정음·용비어천가·과학의 산실이 됨.

  6. 1430

    34

    공법 여론조사

    새 세금 제도(공법)의 찬반을 전국 17만여 명에게 물음. 하정상달의 대표적 실천.

  7. 1441

    45

    측우기 제작 · 과학의 전성기

    세계 최초의 표준 우량계. 간의대·자격루·앙부일구·칠정산 등 천문 과학이 절정에 이름.

  8. 1443

    47

    훈민정음 창제(28자)

    세종이 친히 스물여덟 글자를 지음(『세종실록』 25년 12월조: 上親制諺文二十八字).

  9. 1444

    48

    갑자상소 — 최만리 등의 언문 반대

    집현전 학자 7인이 창제 반대 상소를 올림. 세종이 조목조목 직접 반박(친답).

  10. 1446

    50

    훈민정음 반포(해례본) · 소헌왕후 승하

    제자 원리를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내며 새 문자를 세상에 알림. 같은 해 왕비를 여읨.

  11. 1450

    54

    별세 — 재위 32년

    여러 병환 끝에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 뒤에 '동방의 요순(堯舜)'으로 일컬어짐.

사건 ①: 1418년, 뜻밖의 즉위와 집현전 — 왕이 학자를 기르다

셋째 아들이었던 그는 형의 폐세자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종은 이 뜻밖의 자리를 학문의 정치로 채웠습니다. 집현전을 열어 젊은 학자를 모으고 거의 매일 경연에서 함께 토론했으며, 신분이 낮은 장영실까지 재주로 등용했습니다. '사람을 길러 나라를 다스린다'는 그의 방식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건 ②: 1443–1446년, 훈민정음 — 반대를 넘어선 백성의 문자

한자를 모르는 백성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을 '어엿비 여겨' 세종은 손수 스물여덟 자를 지었습니다. 최만리 등 집현전 학자들이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 '오랑캐의 일이다'라며 정면으로 반대했지만, 세종은 '이것이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便民)이 아니냐'고 조목조목 되물으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통치자가 반대를 무릅쓰고 피지배자를 위한 도구를 만든, 세계사에 드문 사건입니다.

사건 ③: 1430년, 공법 여론조사 — 왕이 백성 17만에게 묻다

세금 제도를 바꾸려던 세종은 곧바로 시행하지 않고, 관리부터 일반 백성까지 전국 17만여 명에게 새 법의 찬반을 물었습니다. 찬성이 많았음에도 반대가 큰 지역의 사정을 살펴 14년에 걸쳐 제도를 다듬었습니다. '아랫사람의 사정이 위에 닿게 한다(下情上達)'는 소통의 정치가 구체적 제도로 나타난 순간이었습니다.

핵심 생각

애민 · 자주 · 실용(便民) · 하정상달 · 흠휼

어려운 한자말은 뜻을 먼저 적고 한자는 괄호에 넣었습니다. 뜻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세종의 사상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실천의 철학입니다. 그 뿌리에는 유교 정치의 이상인 민본(民本) —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생각 — 이 있지만, 세종은 이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憫然·어엿비 너기다)'이라는 애민(愛民)의 정서로까지 밀고 들어갑니다. 훈민정음 창제의 세 목적으로 흔히 꼽히는 자주(自主)·애민(愛民)·실용(便民)이 그의 생각을 압축합니다. '우리말은 중국과 다르다'는 자주의 자각, '어린(어리석은=글 모르는) 백성을 어엿비 여긴다'는 애민,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편히 쓰게 한다'는 실용이 그것입니다. 이 정신은 문자에 그치지 않고 세금(공법 여론조사)·형벌(흠휼)·과학(측우기·칠정산)·복지(의창·양로연)로 두루 뻗어, 백성의 삶에 실제로 닿는 것만을 참된 다스림으로 여기는 하나의 통치 철학을 이룹니다.

애민 (백성을 어엿비 여김)

愛民 · 憫然 · aemin · minyeon

백성을 자식처럼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 세종은 훈민정음 어제 서문에서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가엾이) 여겨(予爲此憫然)'라 하여, 통치의 출발점을 백성의 딱한 처지에 대한 공감에 두었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 『훈민정음』 어제 서문

자주 (우리말·우리글의 주체성)

自主 · 國之語音異乎中國 · jaju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다르다는 자각. 사대(事大)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말소리에 맞는 우리의 글자가 필요하다는 문화적 주체 의식을 문자로 실현했습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실용·편민 (쉽게 익혀 날마다 씀)

便民 · 欲使人人易習 · pyeonmin

누구나 쉽게 배워 일상에서 편히 쓰게 한다는 실용 정신. 훈민정음의 목표는 학문의 과시가 아니라 '사람마다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함'이었습니다. 이 실용주의는 측우기·자격루 같은 백성의 삶에 쓰이는 과학으로도 나타납니다.

사람마다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훈민정음』 어제 서문

하정상달·공론 (아래의 사정이 위에 닿음)

下情上達 · 詢問 · hajeong-sangdal

아랫사람(백성)의 형편과 뜻이 위(임금)에게 전해지게 하는 소통의 정치. 세종은 새 세법을 정하며 17만여 명의 찬반을 물었고(詢問民望), 공론(公論)을 존중해 반대가 큰 곳의 사정을 거듭 살폈습니다.

나머지 3가지 생각은 「지혜의 전당」에서 →

이분의 말

  • 백성을 어엿비 여김(愛民·憫然) — 딱한 처지에 먼저 마음이 감
  • 우리말은 다르다(國之語音異乎中國) — 우리 소리에 맞는 우리 글자
  • 누구나 쉽게 날마다(便民) — 쓰는 사람이 편해야 참된 도구
  • 아래의 사정이 위에 닿게(下情上達) — 정하기 전에 먼저 묻는다
  • 형벌은 삼가고 또 삼감(欽恤) — 사형은 반드시 세 번 심리(삼복법)
  • 본뜨고 획을 더함(象形·加畫·三才) — 글자를 만든 원리
  • 예와 악으로 고르게(禮樂) — 음악을 바로잡아 마음을 고름

남기신 글

한 임금이 남긴 문자와 노래 — 백성의 글로 쓰인 첫 책들

세종이 남긴 것은 한 사람의 저술이 아니라 한 시대의 문화 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 세상에 없던 문자 훈민정음을 지었고, 그 문자가 실제로 쓰인 첫 책들을 펴냈습니다. 새 왕조의 정당성을 우리말 노래로 읊은 『용비어천가』, 부처의 공덕을 기린 『월인천강지곡』은 훈민정음으로 간행된 최초의 문헌입니다. 그 밖에도 한자음을 바로잡은 『동국정운』, 우리 실정에 맞는 의학서 『향약집성방』, 농사 지침서 『농사직설』, 역사서 『고려사』, 역법서 『칠정산』이 모두 그의 재위에 편찬되었습니다. (『용비어천가』·『동국정운』 등은 세종이 친히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명으로 신하들이 편찬한 것으로, 세종 친제(親制)인 훈민정음·월인천강지곡과 구분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1443년 창제 / 1446년 반포

訓民正音 (解例本)

세종이 친히 지은 스물여덟 자와, 집현전 학자들이 그 원리를 풀이한 해설서. '어제 서문'과 예의(例義)에 이어, 제자해·초성해·중성해 등 해례(解例)와 정인지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글자를 만든 원리를 스스로 밝힌, 세계에서 유례없는 문자 창제 기록입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용비어천가

1445년 창작 / 1447년 간행

龍飛御天歌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125장의 서사시이자 악장.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 '해동 육룡(海東六龍)'의 사적을 읊었습니다. 훈민정음으로 간행된 최초의 책으로, 제2장 '뿌리 깊은 나무…'가 특히 유명합니다.

세종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정인지·권제·안지 등이 어명으로 편찬했습니다. 새 왕조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목적의 작품이라는 점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월인천강지곡

1447년경 (세종 친제)

月印千江之曲

세종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며 부처의 공덕을 기려 친히 지은 찬불가. '달(月)이 천 개의 강(千江)에 비친다'는 제목처럼, 하나의 진리가 온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유교 국가의 임금이 지은 불교 노래로, 세종의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보여 줍니다.

동국정운

1448년 간행

東國正韻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표준화한 운서(韻書). 신숙주·성삼문 등이 어명으로 편찬했으며, 새로 만든 훈민정음으로 한자음을 표기한 최초의 시도입니다.

다시 읽는 한 구절

이분이 직접 쓴 문장입니다. 소리 내어 한 번 읽어 보세요.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훈민정음』 어제 서문 (한문)
나·랏〮말〯ᄊᆞ·미〮 中듀ᇰ國·귁·에〮 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 서르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ᆡ〮 … 내〮 이〮ᄅᆞᆯ〮 為·윙〮ᄒᆞ·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ᄍᆞᆼ·ᄅᆞᆯ〮 ᄆᆡᇰᄀᆞ·노·니〮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 「『훈민정음』 언해본 (세종어제훈민정음)

원전 구절 더 읽기 →

오늘 우리에게

AI 시대 — 애민·자주·소통을 다시 읽는다

약 600년 전의 세종이 오늘 청소년에게 말을 겁니다. 그가 훈민정음에 담은 '누구나 쉽게 익혀 제 뜻을 펴게 한다'는 생각은, 정보와 기술이 넘치는 만큼 그 격차도 커진 오늘날 오히려 더 절실합니다. 다만 세종의 통찰을 현대의 쟁점과 잇는 것은 '확정된 정답'이 아니라 '생각의 실마리'로 제시되는 것임을 기억해 주세요.

애민 (백성을 어엿비 여김)

디지털 격차 · 기술 소외

훈민정음은 '글 몰라 억울한 사람'을 위한 기술이었습니다. AI를 쓸 줄 몰라 뒤처지는 사람을 어떻게 살필지 — '기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묻는 자원입니다.

자주 (國之語音異乎中國)

AI 주권 · 한국어 데이터

'우리말은 다르다'며 우리 문자를 만든 정신은, 거대 외국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말을 잘하는 우리 AI, 우리 데이터의 주권'을 생각하게 합니다.

실용·편민 (欲使人人易習)

접근성 · 보편 설계(UX)

'누구나 쉽게'는 오늘의 접근성·유니버설 디자인 정신 그대로입니다. 어려운 기술을 가장 약한 사용자도 쓸 수 있게 만드는 일의 원형입니다.

AI 시대와 이어지는 자리

훈민정음은 "글을 몰라 억울한 사람"을 위한 기술이었다. 새 기술을 쓸 줄 몰라 뒤처지는 사람을 어떻게 살필 것인가 — 세종은 오늘의 접근성과 디지털 격차 문제에 그대로 이어지는 물음을 남겼다.

가르치는 방식

이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묻고 오래 듣습니다. 학생이 반대 의견을 내면 반가워하며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보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바꾸어 되돌려 주는 것을 스스로의 일로 여깁니다 — 쉬운 말로 옮기지 못한 생각은 아직 제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반에서

세종대왕 선생님을 만나는 방법

수업이 아니라 만남입니다. 한 번의 만남은 늘 같은 순서로 닫힙니다 — 오늘의 질문 → 현자와의 대화 → 고전 한 구절 다시 읽기 → 오늘 해볼 한 가지.

  • 어엿비 여기는 마음 — 다섯 번의 만남

    혼자 만나기5번의 만남

    말이 통하지 않을 때 ·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들기 · 정하기 전에 묻기 · 반대에 답하기 · 나의 스물여덟 자를 차례로 이야기합니다.

    그분과 나, 둘이서

  • 누구나 쉽게 — 함께 이야기

    여럿이 함께

    다산·도산 안창호 선생님과 한자리에 앉아 "좋은 것을 모두가 쓰게 하려면"을 이야기합니다.

    여러 분과 한자리에

더 깊이

세종대왕 선생님의
「지혜의 전당」이 열려 있습니다.

일곱 개의 방을 차례로 걸으며 한 사람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봅니다. 마지막 방에서 그분이 당신에게 묻습니다 —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1. 오늘 모실 분
  2. 살던 시대
  3. 살아오신 길
  4. 핵심 생각
  5. 남기신 글
  6. 오늘 우리에게
  7. 이제 당신 차례
「지혜의 전당」 들어가기 →

대화를 시작하려면

세종대왕 선생님과 이야기하려면
우리 반에 들어오세요.

여기는 강의실이 아니라 만나는 자리입니다. 우리 반에 들어오면 다섯 번의 만남, 여러 분과 함께하는 이야기, 매일의 마음 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개 · 남기신 글 · 「지혜의 전당」은 지금도 그냥 둘러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