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는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외가)에서 태어나, 곧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주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집안은 세종 때의 학자 신숙주를 배출한 고령 신씨였으나 살림은 가난했습니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며 '신동'으로 불렸고, 1898년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됩니다. 정통 유학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에 속했지만, 그는 곧 낡은 학문을 넘어섭니다.
박사가 되던 해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관직의 길을 접고 언론에 투신합니다. 『황성신문』을 거쳐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날카로운 논설로 국민을 깨우쳤고, 『을지문덕전』·『이순신전』 같은 영웅 전기와 역사 논설을 써서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웠습니다. 특히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은 왕조 중심의 옛 역사서술을 깨고 '민족'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세운 글로, 한국 근대 민족사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됩니다. 이 무렵 그는 안창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에도 참여했습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신채호는 압록강을 건너 망명길에 오릅니다. 중국 칭다오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 다시 중국 상하이·베이징을 떠돌며 독립운동과 역사 연구를 이어 갔습니다. 이 시기 그는 만주의 고구려·발해 옛 땅을 직접 답사하며 우리 고대사의 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 대륙이었음을 확인하고, 훗날 『조선상고사』로 정리될 방대한 사료를 모았습니다.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서자 참여했으나,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을 알고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까지 팔아먹으려 한다"며 격렬히 반대해 임정을 떠납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 세우자는 '창조파'의 선봉에 섰습니다. 같은 해 의열단장 김원봉의 의뢰로 『조선혁명선언』(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을 집필해, 외교론·준비론을 넘어선 민중 직접혁명의 노선을 천명했습니다.
말년의 그는 무정부주의(아나키즘)에 마음을 두고, 국가·권력 자체를 넘어선 민중 해방을 꿈꾸며 무정부주의동방연맹 활동에 뛰어듭니다. 그러나 운동 자금을 마련하려 관여한 위조 채권 사건으로 1928년 대만 지룽(基隆)항에서 체포되어, 뤼순(旅順) 감옥에서 10년형을 받습니다. 옥중에서도 저술을 멈추지 않았으나,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순국했습니다. 일제의 호적 등재를 끝내 거부한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그 국적은 무려 2009년에야 대한민국 국적으로 회복됩니다. 유해는 고향 청주 고두미에 묻혔습니다.
사건 ①: 1908년, 「독사신론」 — 역사의 주인을 왕조에서 민족으로
그때까지 역사책은 대개 왕과 왕조의 계보(系譜)였습니다.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역사를 쓰는 이는 반드시 그 나라의 주인 되는 종족을 먼저 드러내야 한다"며, 역사의 주인공을 임금이 아닌 '민족'으로 바꾸었습니다. "정신이 없는 역사는 정신이 없는 민족을 낳는다"는 문제의식이 이 글의 심장입니다. 근대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건 ②: 1923년, 『조선혁명선언』 — 외교·준비론과의 결별
의열단장 김원봉의 부탁으로 쓴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강대국에 호소하는 외교론과 힘을 먼저 기르자는 준비론을 '미몽'이라 단호히 물리치고, 오직 깨어난 민중이 스스로 일으키는 '직접혁명'만이 길이라고 선언합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요,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라는 문장은 당시 무장 독립운동의 사상적 뼈대가 되었습니다.
사건 ③: 1936년, 뤼순 감옥 — 이름도 국적도 없는 순국
그는 일제가 강요한 호적에 이름 올리기를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무국적자'로 살다 뤼순 감옥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나라의 역사를 그토록 사랑했던 사학자가 정작 자기 나라의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떠난 이 역설은, 그의 국적이 2009년에야 회복되면서 비로소 매듭지어졌습니다.